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이로 회담 (문단 편집) === 11월 25일 === 이날은 추수감사절이었다. 이날 오전 홉킨스는 루스벨트의 첨삭을 받아 2차 초안을 구술했다. 루스벨트의 지적으로 '이 지역에서~지금 밝힐 수 없지만'이란 문장은 삭제되고 '일본에게서 영구히 빼앗고'란 문장은 '영구히 빼앗겠다고 결단했다'라고 수정되었다. 또한 '일본인이 폭력과 탐욕으로(by violence and greed) 취한 모든 정복지(conquered territory)는 그들의 마수(clutches)로부터 해방된다'는 문장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에서 '적당한 때에(at the proper moment)'로 수정되었다. 10시 반에 캐도건이 홉킨스로부터 루스벨트 수정안을 받았고 중국 측에 이것이 먼저 전달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캐도건은 '문장은 나쁘지만 내용은 괜찮아 보였다'고 평가한 다음에 이를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이를 캐도건은 '몇 가지 결함과 누락된 한 부분을 수정했다'고 평가했다.] 중국과 달리 영국은 초안에 불만이 많았는데 이는 초안에 온통 아시아 얘기만 있을 뿐, 영국에 이득이 되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at the proper moment가 in due course(적절한 절차)로 수정되고 '일본인이 폭력과 탐욕으로 취한 모든 정복지는 그들의 마수로부터 해방된다'는 문장이 '일본은 또한 폭력과 탐욕으로 취한 다른 모든 영토에서 추방된다'로 바꾸었다. 정오에 루스벨트 숙소에서 미영중 삼국 정상의 사진 촬영이 있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장제스와 루스벨트는 다시 30분 간 의논하였다. 촬영이 끝난 직후 왕충후이는 홉킨스를 만나 전날 받은 루스벨트 수정안의 내용에 동의하면서 오가사와라 제도를 펑후 열도로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다. 홉킨스는 이를 수락하며 미국 측의 의견을 전달했는데 세 나라의 영토 야심이 없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홉킨스는 이미 영국이 동의한 상태라고 밝혔다. 이는 전날의 영미 회담에서 논의된 사안이었다. 왕충후이는 동의를 밝혔다. 1시 반에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레더스 간의 오찬회동이 있었고 2시 반에 메나하우스에서 미영 2개국 합동참모회의가 있었다. 5시에는 장제스의 숙소에서 미중 정상회담이 있었다. 장제스와 루스벨트는 1시간 30분간 논의하며 중미 연합 참모본부, 두 나라의 정치협의회, 버마의 수륙공동작전의 조기 실행에 대해 루스벨트가 확인해줄 필요성, 회담 공식 선언 발표 준비, 소위 z군이라 불리는 30개 사단의 장비에 대해 논의했는데 장제스는 일기에서 얘기한 주제만 열거했지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다. 미국 측에선 앨리엇 루스벨트가 당시 대화에 동석하여 기록을 남겼는데 쑹메이링이 중국의 문맹 퇴치를 위한 아이디어를 냈다고만 되어 있지 장제스가 언급한 주제에 대해선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외엔 중국 공산당의 수용 문제에 대해 루스벨트와 장제스가 합의했으며 두 사람이 만족스러워했단 기록이 있다. 장제스는 그날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회담 후, [[프랭클린 루스벨트|그]]는 내게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문제는, 그것도 가장 성가신 문제는, 처칠의 문제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영국은 중국이 강력한 나라가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을 따름입니다.'" 앨리엇 루스벨트의 설명에 따르면 이날 루스벨트는 스틸웰과 독대하며 그의 입장을 들었고 한시간이나 그의 옆에 앉아 있었으며 작별할 때 그가 '동방에서 걸어야 했던 가시밭길'에 대해 동정을 표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